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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전설’ 향해 뛰고 또 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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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사저널 댓글 0건 조회 3,880회 작성일 04-10-2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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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고통을 무릅쓴 채 그들은 왜 뛰고 또 뛰는가. 기적에 가까운 신기록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아마추어 철인들을 만났다.



마라톤 ‘중독자’가 늘고 있다. 가위 폭발적이다. 10월24일 열리는 ‘2004 춘천마라톤 대회’에는 무려 2만4천2백2명이 42.195km 풀코스에 도전한다. 1996년 2백62명이 뛰었으니까 8년 만에 100배 가까이 늘어났다. 단풍이 드는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더 거침없이 내달린다. 마라톤 인구가 기하급수로 느는 이유는 단순하다. 마라톤이 주는 혜택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달린 사람들은 말한다. “스트레스가 완벽하게 해소된다.” “나 자신의 영적·정신적 자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오랫동안 달고 다니던 고질병을 몰아냈다.” “마라톤의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은 곧 인구의 1천분의 1에 해당하는 엘리트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다.”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결단력과 정신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고치며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기회다.”

그 효험을 체험하려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질주하고 있다. 그 행렬의 앞에 국가 대표들보다 더 오래, 더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사람에게 마라톤의 매력과 영광을 전파하고 있는 ‘길 위의 전설’, 즉 아마추어 마라톤계의 ‘스타’들을 만나본다.



한국 최초로 마라톤 풀코스 100번 완주-박용각씨

박용각씨는 지난 9월5일 국내 최초로 마라톤 풀코스 100회 완주에 성공했다. 느릅나무·헛개나무·영지버섯·동충하초 달인 물을 수시로 마신다는 그는 “뛰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아 달리고 또 달린다”라고 말했다.

호리호리한 체구, 수줍은 미소, 친근한 충청도 말씨…. 최근 한국 마라톤사(史)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박용각씨(49·용문중기 대표)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여려 보인다. 그러나 사진 촬영을 위해 마라톤 복장을 갖추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는 우리에서 막 풀려난 야생마 같았다. 허벅지와 장딴지 근육은 그가 판매하는 중장비 부품만큼이나 단단했다. 그는 그 다리로 지난 9월5일 국내 최초로 마라톤 풀코스를 100번 완주했다.

어찌 보면 박씨의 신기록은 기적에 가깝다. 마흔세 살까지 달리기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첫 도전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1998년 3월 어느 날, 그는 신문을 보다가 경주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100m 이상 달려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단순히 자신의 한계를 알고 싶어 그 대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형님이 중풍으로 쓰러져 ‘혹시, 나도?’라며 자신의 건강을 의심하고 있던 터였다.

출정 전 날, 친구가 장도를 축하한다며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친구와 소주 일곱 병을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눈을 잠깐 붙인 뒤 출발선 위에 섰다. 변변한 연습 한 번 못한 처지였다. 긴장한 탓에 다리가 약간 뻣뻣해졌지만 그는 완주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30km에 다다르자 한계에 부딪혔다. 발은 천근만근이었고 좌뇌는 계속해서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으니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결국 길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한 노인이 그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인의 등 뒤에 붙은 글귀가 큼지막하게 눈에 들어왔다. ‘74세. 7번째 풀코스 도전’.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노인을 뒤쫓았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결승선을 통과한 시간은 4시간 36분 28초. 썩 좋은 기록은 아니었지만 그는 대만족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내 운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그는 돌이켰다.

경기를 끝낸 뒤 보름 동안 걷지도 못했지만, 그는 온몸을 휘감는 희열 덕에 아픈 줄 몰랐다. 그 해 10월, 그 쾌감을 다시 체감하려고 춘천마라톤대회에 도전했다. 때때로 알 수 없는 외로움과 함께 신체적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는 그것들을 지그시 억누르며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첫 대회보다 1시간 21초 빠른 3시간 36분 7초 만에 두 번째 풀코스 완주에 성공했다. 이후 전국의 모든 대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뛸 때마다 여러 가지를 얻었다. 자신의 내면과 열정을 확인했고, 유약한 자존심을 강화했다. 달리기가 어찌나 좋은지 2002년 7월에는 길에서 토끼잠을 자며 550km(부산 태종대-임진각)를 1백23시간 동안 달렸다. 지난 5월에는 서울 명동성당을 출발해 수리산(안양)-청계산-남한산성-양수리 등을 거쳐 다시 명동성당으로 돌아오는 220km 거리를 잠 한숨 안자고 34시간 59분 만에 완주한 뒤, 또 다른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풀코스를 완주했다.

올 들어 그가 달린 거리는 약 1500km(연습한 거리까지 합치면 3천km가 넘는다). 풀코스만 스물세 번을 뛰었으니 한 달에 두세 번씩 경기에 참여한 셈이다. 뛸 때마다 구름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그는, 앞으로도 모든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길 위의 철인’답게 목표도 거창하다. 풀코스 1천번 완주, 100km 울트라 마라톤 100번 완주(현재 열 번)가 그것이다. “1년에 서른 번씩 30년 뛰면 못할 일도 아니다. 자신 있다.”



그 옛날 영광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리다-전명환 서울시의회 의원

전명환 서울시의회 의원은 뛸 때마다 고통 속에서 헤매지만,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서울시의회 전명환 의원(56)은 한국 아마추어 마라톤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86년부터 풀코스에 도전해왔으니까 올해로 28년째 달리고 있다. 20여년 전만 해도 마라톤 대회가 거의 없었고 자격 제한이 심해서 풀코스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당시 그의 신장은 155cm. 그 키에 체중이 75kg이어서 뚱뚱하고 굼뜨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게다가 몸속에는 담석까지 자라고 있었다.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요로 결석 때문에 생기는 통증과, 운동을 안 하면 살이 찌는 이상 체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비만 때문에 42세에 세상을 뜬 동생에 대한 기억도 그의 등을 떠밀었다. 다행히 달리기만 하면 통증이 멎고 체중이 줄었다.

그러나 달리기를 두세 달 멈추면 통증이 도지고 살이 붙었다. 그 바람에 틈만 나면 달려야 했고 수십 차례 풀코스를 완주했다. 1994년에는 국가 대표급 선수들과 경주해 2시간 42분으로 9위를 차지했다. 토요일에 풀코스를 뛰고 그 다음날 다시 풀코스를 뛰는 ‘괴력’을 세 번이나 발휘했다. 2002년 이후에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출전해 한국 신기록(8시간 45분)으로 우승했다.

탱크 같은 힘 덕에 그는 2002년 초까지만 해도 아마추어 마라톤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국내 최초로 풀코스를 100번 완주한 박용각씨가 풀코스 완주 예순 번을 넘어섰을 때 그는 이미 아흔세 번을 통과한 ‘선수’였다. 게다가 서브3(2시간대에 완주하는 것)도 여러 번 기록해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2002년 6월,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면서 그의 마라톤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다. 의회 일정에 쫓겨 뛸 기회를 전혀 못 잡은 것이다.

지난 9월5일, 그는 아흔여덟 번째 풀코스에 도전했다가 크게 봉변했다. 반환점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25km를 넘어서자 허벅지 근처가 축축했다. 내려다보니 팬츠 고무줄이 살진 허벅지를 파고들어 피가 새빨갛게 흘러내렸다. 신발이 빨갛게 물들 무렵 진행요원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응급차에 오르십시오. 위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한때 ‘최고’ 소리를 듣던 마라토너가 아니었던가. 뼈와 힘줄, 근육에 무리가 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7km를 걷다시피 해서 마침내 4시간 36분 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는 “나로서는 최악의 기록이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라고 말했다.

전명환씨의 ‘전설’을 말할 때 황영조 선수를 빼놓을 수 없다. 1999년 3월, 호형호제하던 두 사람은 경주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만났다. 그리고 늦게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이 저녁을 내기로 약속했다. 황영조가 누구던가. 그러나 전씨는 자신이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해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몸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0km를 나란히 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황씨가 근육에 힘을 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렇게 해서는 서브3 못합니다. 먼저 갑니다.” 당시 황씨는 3시간 안에 들어가면 포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의식한 것 같았다. 점점 멀어지는 황씨를 보며 전씨는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30km쯤에서 황씨를 만났다. 황씨는 오버 페이스로 처져 있었다. 그는 황씨를 툭 치며 ‘나 먼저 간다’하고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40km를 통과할 즈음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국민 마라토너의 자존심을 짓밟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전씨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거꾸로 뛰는 그를 보며 달려오던 마라토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38km 지점으로 돌아가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황영조씨가 나타났다. 그는 웃으며 황씨의 등을 두드렸고, 결국 3시간 7분 만에 황씨와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날 저녁을 황씨가 거하게 냈음은 물론이다.

지난 10월3일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하이서울마라톤대회에서 마침내 100번째 풀코스를 완주했기 때문이다. 기록은 3시간50분대였지만 지난 6개월 동안 연습을 거의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나쁜 기록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치 때문에 목숨 같은 마라톤을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 임기가 끝나면 마라톤보다 훨씬 힘든 정치는 접고, 사업(과일 경매업)과 마라톤에 매진할 계획이란다. 그는 10km를 뛰면 열 가지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장품 1천t을 쓴 것보다 더 피부가 고와진다며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몸무게 45kg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성의 ‘괴력’-장영신씨

장영신씨는 10월24일 국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풀코스 100회에 도전한다. 작은 체구(키 160cm 안쪽, 몸무게 45kg) 때문에 지금도 풀코스를 완주한다고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주말이면 마라톤 대회가 서너 개씩 열리는 요즘 장영신씨(51·서울 잠원동)의 주가는 상한가다. 내로라 하는 신문사들이 그녀를 애타게 부른다. 국내 여성 최초로 도전하는 풀코스 100번 완주를 자기네가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에서 달성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D-데이로 잡은 것이 10월24일 2004 춘천마라톤대회. 그녀는 요즘 몸만들기에 한창이다.

그녀 역시 마라톤과는 우연히 만났다. 남편을 따라 1997년부터 한강변에 나가 잠깐씩 뛴 것이 달리기 이력의 전부였다. 1998년 3월1일, 그녀는 자신의 심장 기능이 어떤지, 42.195km가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도 모른 채 풀코스에 도전했다. 문제는 신발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나갔더니 아는 사람들이 ‘놀러 왔느냐’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달리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신발을 신고 멋지게 완주해냈다. 기록도 4시간 11분으로 비교적 양호했다.

용기백배한 그녀는 몇달 뒤 동아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어찌어찌 달리다 보니 여성부 2위를 차지했다. 시상대에 올라서 보니 또 다른 쾌감이 있었다. 이후 1주일마다 풀코스에 도전했다. 얼마나 자주 얼굴을 내밀었던지, 뒤쪽에서 ‘입상하기 위해 나왔다’는 쑥덕거림까지 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목표는 상이 아니었다. 단지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이 된 듯해서, 그것이 좋아서 뛸 뿐이었다. 그녀는 “달릴 때마다 수학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언제나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라고 말했다. 그 덕에 지난해에 풀코스를 스물여덟 번 완주했고, 올해에도 벌써 스물네 번이나 완주했다(10월10일 현재).

한 달에 두세 차례씩 42.195km를 달렸지만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중도 하차한 적이 없다. 물론 작은 체구로 인해 뛸 때마다 참을 수 없이 힘겨운 순간을 맞는다. ‘이 힘든 짓을 무엇하러 하나’하는 회의감이 그녀의 다리에서 힘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녀는 그 고비를 ‘마라톤은 체력 30%, 정신력 70%’라는 믿음으로 추스른다. 그렇지만 쉬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주저앉는다. 기록을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달리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요즘은 덜 달리는 편이다. 한창 마라톤에 심취했던 1999~2001년에는 매일 30km 이상을 달렸다. 강인한 훈련은 그녀의 몸에 감추어진 내면의 힘을 불러냈다. 언젠가는 그 매력에 도취되어 새벽 3시까지 달린 적이 있다. 늘 함께 달려주는 남편의 도움이 컸다(그녀의 남편도 풀코스를 일흔 번 이상 완주한 마라톤광이다).

한때 풀코스를 100번 완주한 뒤 승마나 다른 운동을 해볼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라톤 중독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 미래에도 더 달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10월17일 그녀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녀의 이름은 한국 아마추어 마라톤 역사에 새로운 ‘전설’로 기록될 것이다.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782호 | ㆍ등록일 : 2004/10/12 10:52 | ㆍ수정일 : 2004/10/1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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